D.ohnald

박 선생

박 선생은 밝은 곳에서 만나는 법이 없다. 또 미리 약속을 잡는다거나 하는 일도 없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어두운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박 선생을 마주했다.

만남

잘 지내는가?

깜짝이야. 박 선생님 아니십니까. 어쩐 일로 누추한 곳에 다 오셨습니까?

누추한 곳이 마음에 편해. 잘 지내? 가족들은 잘 있고?

가족들은 아이랑 다 자고 있지요. 선생님은 혼자 오셨습니까?

나야 뭐. 혼자 다니는 게 편해. 괜히 꼬리 달고 다니면 사람들 눈에 더 잘 띌 거 아닌가.

하긴 그렇죠.

자네는 요즘 좀 살만 한가 봐? 이런 시간에 어쩐 일로 여길 다 나왔어?

아. 가족들 재우고 혼자 시간 좀 갖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그래 그런 시간도 좀 있어야지. 그래야 큰일을 하지.

선생님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나는 그냥 지나가는 길이야. 그럼 난 가던 길 계속 갈게.

계획

잠시만요 박 선생님. 여기까지 그냥 오시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고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십니까.

어허 젊은 사람이 의심은. 나 진짜 그냥 지나가는 길이야. 내가 가는 길에 자네가 나타난 것 아닌가.

선생님께서 혼자라는 말도 좀 믿기 어려운데요. 검은 무리들과 항상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이 사람 오늘따라 좀 예민하구먼. 나 진짜 혼자 왔고, 지나가는 길이고, 가던 길 가려 하네. 우리 만났던 것은 없던 일로 해주겠네.

아니죠 박 영감님. 지금 혼자 여기까지 오셨다는 말을 믿으라고요?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는 말을 믿으라고요? 제가 박 영감님을 한두 해 봤습니까?

아, 아니. 젊은 사람이 이렇게 의심이 많으면 쓰겠나.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될 때 만납시다. 나는 이만 가봅니다.

멈춰 박 영감!

으윽...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내 언젠가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알고 늘 준비했지. 갑자기 만나서 당황했지만 괜찮아, 모두 계획 대로야.

너..너 이 녀석..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야.

뭐 어뗘. 우리가 피를 나눈 사이도 아니고 같은 족속도 아닌데. 이럴 수 있는 거 아냐?

젠장. 분하다. 조금만 빨리 움직였어도.

당신도 나 만나서 당황한 것 같은데 맞아? 내가 너무 갑자기 나타났지?

그..그래. 맞다. 당황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기다린 건 아니지만 이런 때를 대비해 시뮬레이션을 해왔지.

나를 못 움직이게 한 것 까지는 인정하겠다만 어떻게 할 셈이냐.

해변가로 모셔드리겠습니다요. 선탠을 하시든 모히또를 즐기든 알아서 살아남으시죠.

날 옮기는 게 쉽지는 않을 거다. 네 생각보단 내가 잽쌀 거야.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요, 박 선생님.

해결사

준비한 종이로 종이컵 바닥을 막고 변기로 이동했다.

박 선생님. 여행 잘 하쇼.

종이컵을 흔들어 정신을 못 차리게 한 후, 변기를 내리며 막았던 종이를 열어 박 선생을 떨어트렸다. 박 선생은 정신을 잃은 채 변기에 휩쓸려 내려갔다.

바퀴벌레 약을 쳐놓고 여행이라도 다녀와야지 찝찝해서 안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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