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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권용선

created: 2024/03/01
updated: 2025/01/21


[[발터-벤야민]]의 철학 개념을 이해하기에 너무 아는 것이 없다. 시간이 지나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이나 사상 전체보다는 현재의 관심사인 글과 공부에 대한 생각이 끌린다. 평생 공부하며 살아갈 삶이라면 더 깊이 알아가보고 싶다.


기술의 발전은 그에게 생산도구의 변혁이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하게 만들었고, “생산도구를 변혁시킨다는 것은 지식인의 생산을 구속하고 있는 제약들 중의 하나를 다시금 무너뜨리고, 대립들 중의 하나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생산자로서의 작가」, 263쪽)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과거와 현재는 시간적 연속성을 갖는 연대기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들과 이야기가 현재의 맥락 위에서 시각화됨으로써 그것을 보는 지금 사람들에게 어떤 인식의 비약과 각성의 순간을 도모하게 하는 것에 가깝다.


더 많은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이 읽고 공감할 수 있으며 세계의 불편부당과 자신들의 처지를 각성할 수 있는 글이 필요하다. 벤야민은 이런 글을 딱딱한 책의 형태가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자주 접하는 형식으로-때로는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기까지 한 방식으로-실험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전단이나 팸플릿, 잡지 기사나 포스터 등과 같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이미지’와 함께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방식의 글쓰기와 같은 것이다.


벤야민은 책과 장난감과 우표를 수집하듯 문장들도 수집했다. 각각의 책에서 떨어져 나온 문장들은 수집가의 손을 거쳐 커다란 백지 위에 재배치된다. 이 때문에 그 문장들이 자리잡고 있던 텍스트 본래의 맥락은 사라지지만, 새로운 배치, 즉 이웃한 다른 문장들과 그것들을 묶은 상위의 카테고리 속에서 새로운 맥락과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집된 문장들 자체가 지닌 내용이나 가치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벤야민은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존재와 세상의 이치에 대해 언제나 질문하며, 그것을 ‘읽고 쓰는’ 방식으로 풀어 나가는 한 명의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그는 자신의 한계 및 시대의 한계와 언제나 불화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생활인으로서는 무능했고, 관계에 서툴렀다. 이 말이, 그가 현실과 동떨어진 자족적 관념의 세계 속에서만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무능과 그로부터 비롯된 불편함을 안고 공부했으며, 그런 태도로 제 몫의 삶을 온전히 살았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공부’는 점점 더 밥벌이의 기예를 익히는 데 한정해서만, 또는 개인의 ‘수양’을 연마하는 태도로써만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공부는, 그것이 비록 실험과 실패의 연속일지라도, 더 좋은 삶을 위해 자신과 더불어 이 세계를 호흡하는 모든 존재를 ‘해방’시키는 쪽에 서야 한다.


세렌디피티는 벤야민이 자주 사용한 방식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그것에 대해서만 공부하지 않았다. 사건과 인물, 장소와 이론이 갖는 직접적이고 명백한 관련성을 증명하는 일보다는,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무관한 ‘파편’들을 하나의 시공간 위에 배치하는 몽타주 놀이에 흥미를 보였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않은 효과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그는 분과 학문의 틀과 글쓰기의 규범을 자주 해체하고 새롭게 조립하는 실험을 매번 반복했다.


책을 사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는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언제나 우연한 방식으로, 또한 운명적으로 어떤 책들과 만났다. 그 일은 대체로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는 길을 잃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그의 태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지도 없이 낯선 도시에서 헤매듯이 길을 잃고 돌아다니다 보면 예기치 않게 어느 골목 모퉁이에 자리 잡은 헌책방과 마주쳤을 테고,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희귀하고 소중한 책들을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자료가 될 만한 텍스트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벤야민의 태도는 자신이 쓴 글을 취급하는 태도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는 한 편의 글을 독립적이고 완결된 것으로만 취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자신이 쓴 텍스트를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는 건축물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새로 쓰는 글 속에 이전에 썼던 글의 일부를 잘라내서 다시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단어와 문장 그리고 개별 단락들을 어느 한곳에 고정하지 않고 그것들이 어울릴 수 있는 글에 잘라다 붙이면서 그 각각이 고유하고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취급하며 활용했다. 그에 더해 완결된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그것들을 취급하는 것이 아닌, 취급하는 이의 관점과 위치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는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해했다. 그리하여 마치 레고 블록들처럼 각기 독특한 색깔을 지닌 그것들은 벤야민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나 절단되고 채취되어 새로운 텍스트 위에 재배치되었다. 각각의 요소들과 그것들의 근거가 되는 지식에는 어떤 위계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쓴 글을 포함해서 어떤 텍스트와 무자했을 때 벤야민이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아카이브화하고, 수집하고, 구성(배치)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가 보여준 독특한 시각은 자료들을 발췌, 번역, 몽타주화, 재배치화하는 데서 다시 확인된다. 그는 이런 태도를 통해 기존의 연구 방법과 거리를 두는 한편, 쓸모없는 것들 혹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어왓던 역사의 자료와 인물들과 사건들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벤야만은 자기 스스로에게나 남들에게 일관된 존재로 비쳐지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완성’보다는 ‘미완’의 상태에 매력을 느꼈고, 그것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완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에 한없이 가까워지려는 노력만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의 작품이나 공부가 완결되었다고 만족해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뛰어넘는 다음은 없다. 벤야민은 무엇보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완결되지 않은 것, 어딘지 모르지만 부족함이 있다는 경계를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근면함으로 모든 공부의 과정을 돌파하려고 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알고있는 모든 위대한 사람과 천재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공부란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에게 공부란 조용한 방 안의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 즉 지식의 습득에 가깝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읽고 이해한 내용을 글로 쓰는 것. 이 과정을 통과할 때만 배우고 익힌 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공부란 무엇보다 고독한 독서의 시간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공부는 모든 공부의 시작, 혹은 공부로 나아가는 하나의 들머리에 불과하다.


이 책의 일차적 관심은 벤야민이 품었을 법한 질문을 추적하는 일이고, 그 질문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해답을 찾아가는지, 그리고 그에게 공부란 무엇이었으며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지를 가늠해보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다시 지금 우리에게 공부란 무엇이고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공부’를 팽개치지 않았다. 공부하는 것만이 개인적인 불행 뿐 아니라 비루하고 염치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법이며, 고장난 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다시 살 만한 곳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방식이라고 그는 믿었다.


낯선 것, 미지의 것을 읽고 이해하고 자기화할 때, 즉 그것을 다시 객관적인 방식으로(글을 쓴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지식은 발생한다. 이때 읽고 이해하고 자기화하는 과정 속에는 그 지식의 대상을 특정한 기준에 맞추어 체계화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된다.